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관리 메뉴

딘델라의 세상보기

구가의서, 부모세대 비극보여준 천년악귀 구월령의 비애 본문

Drama

구가의서, 부모세대 비극보여준 천년악귀 구월령의 비애


딘델라 2013. 5. 29. 14:11

'구가의 서'가 점점 흥미를 더하면서 시청률 20%를 경신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구가의 서'가 탄력을 받는 데는 캐릭터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죠. 극본면에선 완벽하다고 평할 수 없지만, 판타지 드라마를 구성하는 큰 요소인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전면에 포진하고 있기에 좀처럼 채널을 돌리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판타지 장르인 '구가의 서'는 인물들의 감정선에 저절로 몰입하며 다양한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특히 15, 16회에선 천년악귀가 된 구월령 캐릭터가 반전이었습니다. 지난주 천년악귀가 된 구월령은 모든 것을 소멸하겠다며 강치를 죽이려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러나 구월령은 완전한 악귀가 되지는 못했지요. 그는 담여울을 죽이지 않고, 그녀에게 담평준이 무고한 강치의 아버지 월령을 죽였다는 진실을 알려줬습니다. 그리고 강치 앞에 나타난 월령은 인간이 되려는 아들에게 마지막 기회라며 인간이 되기를 포기하라 하지요.

 

 

그는 인간에게 상처받고 배척당할거라며 신수로 남으라 설득했습니다. 허나 강치는 외로운 괴물로 평생을 사느니 인간답게 살고자 한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들의 비수돋친 말은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인간으로 살아왔던 강치에겐 아버지는 그저 반인반수 굴레만 남긴 원망이었지요. 평생 신수로 살다가 배신으로 천년악귀가 된 월령과 인간으로 살다가 신수의 자식임을 알고 살고자 인간이 되려하는 강치! 서로를 이해하기엔 너무나 간극이 컸던 부자상봉이 애처로웠습니다. 이렇게 월령은 강치를 죽이지 않고 설득했습니다. 연민조차 메말라버린 섬뜩한 천년악귀라 생각했던 구월령은 아들 강치에 흔들렸습니다.

 

또한 아들 강치는 지리산의 보호아래 신묘한 힘으로 풀도 자라게 하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으나, 월령은 천년악귀의 댓가로 신수의 능력을 모두 상실해 상처도 치유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신수의 능력을 발휘하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소멸시키기만 하는 자신의 현재를 고독한 눈빛으로 바라봤습니다. 그런 부자의 대조적인 모습들이 천년악귀 구월령의 비애를 실감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천년악귀의 고독함은 산의 주인이란 신수의 자부심마저 소멸시켰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말리는 월령의 방식이 잘못되었지만, 그런 월령의 마음도 이해는 되었습니다. 실패를 경험한 월령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조언은 그런 서툰 부성애가 다였을 것입니다. 이런 구월령의 비애는 강치와 대적하는 비극을 더욱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천년악귀가 된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잘못도 없이 천년악귀가 되었지만, 신수시절보다 더욱 고독한 천년악귀 구월령은 이해받지 못하는 괴물이 되었습니다. 이런 구월령의 안쓰러움은 서화와 다른 담여울의 존재때문에 더욱 커지죠. 강치가 무엇을 하든 강치의 존재를 그대로 믿어주는 담여울이 있기에 지금의 강치는 아버지와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본질을 그대로 인정해주는 여울의 존재는 강치를 신수로 변하지 않게 해줬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가의 서'의 해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날 강치는 조관웅 때문에 이순신이 곤란이 처하자,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서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인간증명을 했습니다. 강치가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팔찌를 빼고도 인간을 유지할 수 있던 것은 여울이 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모한 일이지만 여울에 대한 믿음으로 인간증명에 성공했기에 강치는 억울한 오해를 벗으며 점점 도관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다르다는 게 틀린게 아님을 증명해가며 사람들을 깨우쳐가는 강치! 그가 이렇게 사람들 속에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던 것은 담여울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인반수 강치를 그대로 믿어주고 늘 편들어 주는 여울이 있기에 강치 역시 사람들의 믿음을 얻을 용기가 난 것이지요.

 

 

이렇게 강치와 여울이 서로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어려움을 극복할 수록, 더욱 안타까운 것은 서화와 월령의 비극적인 상황입니다. 윤서화가 좀더 구월령에 대한 믿음을 보여줬다면, 그리고 월령도 다른 존재를 향한 인간의 두려움을 안일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런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겠지요. 인간이 영원하지 않아서 더 숭고하고 그래서 아름답다고 말하던 구월령은 천진하게 절대 실패하지 않고 인간이 될 수 있다 장담했습니다. 그만큼 서화에 대한 믿음과 사랑도 컸고, 순진할 만큼 인간들에 대한 동경과 연민도 강했습니다. 어쩌면 구월령도 자신의 존재를 내보이는 게 두려웠을지 모릅니다. 세상은 신수에 대한 두려움이 컸고, 다른 존재에 대한 인간들의 경계심을 극복하기란 힘든 상황이었죠. 결국 신수라는 그 본질을 그대로 인정하지 못한 서화와 자신의 존재를 그대로 드러내기 두려웠던 월령은 서로에게 비극적인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날 이순신은 강치에게 ' 믿음의 무게는 관계의 무게다 '라는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이 말이 바로 부모세대의 비극을 대변해주는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이 나눈 사랑은 서로를 알아가기엔 너무나 짧았습니다. 연민인지 사랑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결국 모든 상항이 본질마저 이해하기엔 간극이 컸습니다. 어쩌면 서화의 사랑은 지극히 현실적인 인간의 갈등과 후회를 담았습니다. 그래서 담여울의 존재는 더욱 빛나는 것입니다. 그녀는 모든 상황을 초월하는 운명의 상대니까요. 그만큼 인간이 되는 길은 애초부터 초월적인 사랑이 있어야 가능했고, 인간의 한계를 초월적으로 극복해야 가능했습니다. 그러니 '구가의 서'가 전설로만 전해지며 제대로 본 이가 없었겠죠.

 

 

이처럼 부모세대에선 지극히 현실적인 제약이 진정한 사랑을 완성시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비극적인 사랑은 교훈이 되어 자식세대의 사랑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여울과 강치는 모두가 안될 것이라 말하던 그것을 깨부수는 진정한 완성형의 사랑을 보여주겠죠. 그래서 '구가의 서'는  월령과 서화를 생각하면 가슴아프게 슬프다가도, 희망을 담은 강치와 여울의 사랑을 바라보며 그것이 끝이 아님에 안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서화와 월령의 비극에도 분명한 마침표는 존재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너무 슬플테니까요. 서화의 등장은  월령을 위한 것으로 봐야할 것입니다. 비록 완전한 결실은 맺지 못해도 월령의 천년악귀 굴레를 벗기며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을때, 그것이 두사람에겐 겉으로는 비극이 되어도 가장 아름다운 끝이 되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공유하기 링크

 

Comments